면밀한 검토 없이 즉흥적으로 ‘탁상 정책’이 만들어지면 열에 아홉은 예산 누수로 이어지게 된다. 같은 부처 안에서도 엇박자를 내며 상반된 정책에 혈세를 쏟아붓기도 한다. 다시 원상복구하는 데 드는 비용 역시 국민의 몫이다. 제주시의 한 초등학교 교실. 국어 수업이 시작됐지만 분위기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음악 수업중인 옆반의 전자오르간과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일상적인 일이 됐는지 교사와 학생들은 짜증내기도 귀찮다는 표정이다. 소음이 커지자 담임 교사는 교탁 아래에 있는 마이크를 꺼내 들고 수업을 이어간다. 수업을 마친 교사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서로 수업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죠”라며 한숨을 내쉰다.

“필통 떨어뜨리는 소리는 물론이고요. 옆반에서 어떤 학생이 야단을 맞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어요. 애들은 ‘누구가 또 걸렸나봐’ 하며 킥킥 거리고….”

이러한 모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 학교가 1998년 ‘열린 교육’을 도입하면서부터다. 넓고 개방된 교실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 정책에 따라 복도 벽을 허물었다. 복도만큼 교실이 넓어지긴 했지만 방음벽이 사라지는 바람에 수업 중 소음이 고스란히 다른 반으로 전달된다. 또 수업 시간을 자율화한 결과 쉬는 시간인 학급과 수업 시간인 학급이 엇갈리는 등 이래저래 소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열린 교실’은 비단 제주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수도권 등 상당수 지역에서 교실 벽을 허무는 공사가 유행처럼 번졌다. 교육부도 ‘교실수업환경 개선지침’을 통해 교실 개방을 권장했다. 특히 전 교육감이 ‘열린 교육’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제주도의 경우 117개교 중 76개교가 복도벽을 허물 정도로 참여율이 높았다. 지난해 제주교육청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996~2002년 중 들어간 비용은 3백5억원. 벽을 허무는 공사비 외에 교실 바닥 카페트와 여러 명이 쓸 수 있는 대형 책상, 교구함 구입 등에 쓰였다.

도입 초기부터 면학 분위기 저하 등 문제점이 지적됐지만 번번이 무시됐다는 게 교사들의 설명. 열린 교실을 만들지 않은 학교에선 교실 뒷문이라도 열어두고 수업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얘기다.

“열린 교육을 한다면서 문제 제기를 하는 교사에게 시말서를 쓰라고…오히려 닫힌 교실을 만든 거죠.”(전교조 제주지부 고의숙 정책실장)

일부 교사들은 목청을 높이다 성대결절 진단을 받고 휴직하기도 했다. 한 교육계 인사는 “선진국처럼 학교에 별도 음악실·미술실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껍데기만 빌려오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학생·학부모들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창고에 쌓아둔 기존 책·걸상을 다시 꺼내 사용하기 시작했고 복도에는 미닫이문이 달렸다.

제주도는 이번 겨울방학부터 대대적인 ‘열린 교실’ 보수공사를 벌일 예정이다. 앞으로 6년간에 걸쳐 복도벽을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다. 공사 대상은 792개 교실로 도내 전체 초등학교 교실의 46%다. 복구비용은 한 학급당 5백만원, 총 40억여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잘못된 정책에 대한 뒷수습을 하느라 다시 돈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제주교육청 양학송 공보감사담당관은 “결과적으로 추가 예산이 들어가게 됐지만 문제점 보완을 통해 열린 교육의 취지를 살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의 장·단점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은 채 뛰어들었다가 헛돈만 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1년 행정자치부가 벌였던 ‘월드컵 대비 무궁화 조기개화’ 사업도 대표적인 졸속 정책으로 꼽힌다. “나라 꽃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며 8월초인 무궁화 개화시기를 월드컵 때로 2개월 앞당기는 작업에 나선 것. 당시 행자부에 ‘밑빠진 독 상’을 줬던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정창수 예산감시국장은 “1,200원짜리 무궁화를 그루당 17만원이나 들여 개화시키겠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심지어 한 부처가 서로 반대되는 정책을 펴는 경우도 있다. 농림부는 과잉 생산되는 우유량을 조절하기 위해 젖소를 도축하거나 낙농업을 포기하는 업자에게 2002년부터 2년간 도태장려금과 폐업지원자금 명목으로 각각 48억원과 1백64억원을 지급했다. 낙농시설이나 젖소입식을 위한 정책자금융자까지 중단하라는 장관 방침까지 하달됐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농림부내 농촌인력과에서는 신규 낙농업자에게 연간 27억~55억원의 사업 자금을 융자해줬다. 당시 감사를 벌였던 감사원 관계자는 “한 축산업자가 양쪽 자금을 모두 받은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농림부는 “감산 정책을 하더라도 낙농인 양성을 포기할 순 없지 않느냐”고 밝혔지만, “농림부는 상반된 정책을 펴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사원 지적이 있고서야 알게 됐다”는 게 감사원의 설명이다.

<특별취재팀 권석천·조현철·정유진기자 / 제주 강홍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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