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을 대신해 나라 살림을 감시해야 하는 국회의 예·결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허술한 예·결산 심의와 국회의원들의 ‘지역 민원’ 등 고질병이 개선될 조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치개혁의 기대를 안고 출범한 17대 국회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12월4일 국회 예결특위 전체회의장.
“부지 정비와 토목 공사 착공시기를 1년 앞당기려면 이 정도의 예산은 필요합니다.”
쟁점은 2005년 예산안에 편성된 ‘청소년 스페이스 캠프’(가칭) 건립 비용 74억6천만원. 소관부처인 문화관광부가 예산안 반영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실시한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기준 미달’로 평가됐다. 경제성 분석(B/C) 비율이 1.0 이상 돼야 하는데 0.3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 것. 또 캠프 대상지인 고흥군 내나르도에서 22㎞ 떨어진 곳에 과학기술부가 2백75억원(총사업비)을 들여 우주 관련 종합박물관인 우주체험관을 세울 예정이다. 예결위원들은 “중복 투자의 우려가 있다”(열린우리당 권선택 의원), “당정을 통해 50억원이 추가된 것”(한나라당 전재희 의원)이라며 대폭 삭감을 주장했다. 국회 예결위 검토보고 내용도 “기존 예산 중 기본설계비를 쓰지 않은 데다 타당성 재검증 절차로 인해 2005년 예산은 연내 집행이 불가능한 만큼 전액 삭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문광부가 “체험시설(문광부)과 전시시설(과기부)로 조정돼 중복투자의 우려는 없다”고 답변한 가운데 한 예결위원이 거들고 나섰다. 고흥을 지역구로 둔 신중식 의원(열린우리당). 그는 “전 국민과 관광객들이 캠프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 해외의 유명 우주체험센터에 비해 손색이 없도록 차질없이 추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예결위 전체회의후 열린 계수조정 소위에서 나온 결과는 ‘44억6천만원’. 예결위원 다수의 ‘당초 요구액(24억6천만원)수준으로의 삭감’과 소수의 ‘유지’ 의견을 반반씩 절충한 것.
이처럼 국회의사당 522호실에서 열리는 계수조정 소위는 다음해 예산을 판가름짓는 ‘최종 본선’으로 정치적 흥정과 이해 절충에 따라 크고 작은 사업의 예산이 증액되고 삭감되곤 한다. 심지어 ‘각본’에 없던 예산을 끼워넣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구·경북 한방산업진흥원 설립사업의 경우 해당부처인 보건복지부까지 “한방산업 육성계획이 마련돼 있지 않아 예산지원이 불가능하다”고 제시했지만, 대구·경북(TK)지역 한나라당 의원들의 밀어붙이기 끝에 20억원이 배정됐다. 목포시 유달산 일주도로와 평화광장~영산강 하구간 도로 우레탄 포장사업도 정세균 예결위원장의 검토 요청으로 반영됐다. 목포시 관계자는 “예산안 편성후 뒤늦게 신청했기 때문에 안될 줄 알았는데 9억원이나 나와 다행”이라고 말했다. 지병문 의원(열린우리당)은 광주 광산경찰서 목욕탕 신축예산 지원을 요구해 결국 6억원을 관철시켰다.

소위 중간 중간에는 각 당의 예결위 간사들이 별도 회의를 갖는다. 속기록에 남지 않는 점을 이용, 본격적으로 지역 예산을 챙기는 과정이다. 올해도 이 과정을 통해 건설 및 교통 관련예산이 대폭 증액됐다. 정부안에는 아예 들어있지 않았던 광주~완도, 거제~통영 구간 고속도로 조사 예산이 각각 30억원, 20억원 반영됐다. 반면 농어촌복합노인복지시설(35억원), 보육시설기능보강(76억원), 장애아동학비지원(2억원) 등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예산은 줄줄이 깎였다.
예산심의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 있지 않다. 현행 국회법에는 예결위원들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지역구 이해와 직결된 자리인 만큼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하자는 취지다. 지난 16대 국회에서 예결위원회를 거쳐간 200명 중 절반가량인 104명은 재선임을 받지 못했고, 자신이 심의·의결한 예산을 다시 해당연도 결산과정에서 다룬 예결위원은 27%에 불과했다.
결산은 더 엉터리다. ‘조기결산제’ 도입으로 정부는 매년 5월말까지 결산자료를 국회에 제출해야 하고 국회는 정기국회 개시전까지 결산심사를 마쳐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정부가 결산자료를 8월말에 집중적으로 제출함에 따라 9월2일까지 종결해야 하는 결산심사가 서면질의로 대체되거나 정기국회로 미뤄지면서 무력화됐다. 행자위 이영순 위원(민주노동당)은 “결산심의를 하루 앞두고, 그것도 오후에서야 자료를 갖다주면 어떻게 검토하고 심의를 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실련 이원희 예산감시위원장은 “미국의 경우 시민단체가 지역구 사업을 챙긴 의원명단을 발표한다”면서 “우리도 이같은 장치를 통해 예산심의의 신중함과 책임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권석천·조현철·정유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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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 정상처리 95년 한차례뿐 ]
국회는 늦어도 12월2일까지 다음해 예산안을 통과시켜야 하지만 실제 국회에서 이 ‘데드라인’(마감일)이 지켜진 적은 거의 없다.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예산결산위원회 파행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4대 국회부터 2004년까지 13년동안 정해진 기일내에 예산안이 처리된 경우는 5차례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3년(1992, 1997, 2002년)은 선거전에 뛰어드느라 정기국회 일정이 앞당겨졌고 예산심의도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94년은 이틀만 심의한 뒤 여당 단독으로 예산안을 처리했다. 시민행동은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95년 한해뿐”이라고 지적했다.

나머지 예산국회는 정쟁(政爭)에 발목잡혀 제 날짜를 지키지 못했다. 93년에는 김대중 내란사건 등 과거사청산 문제와 보안법·안기부법·선거법 등 정치관계법이 예산안 처리와 연계되면서 20여일간 예산안 심의가 중단됐다. 98년에는 제2건국위 예산지원, 99년은 옷로비 특검수사와 정치관계법 개정안에 대한 여야간 이견으로 처리시한을 넘겼다.
최근에는 여야간 대립이 한층 심해지면서 정기국회 내에 예산안 심의조차 마치지 못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예산심의용 임시국회가 별도로 열려야 했고 회계연도 종료를 코 앞에 두고 예산안이 통과되는 일이 반복됐다.
2000년은 김용갑 의원의 “민주당은 조선공산당 2중대” 발언과 박순용 당시 검찰총장·신승남 대검차장 탄핵소추안 처리 건으로 예결위 활동이 마비됐다. 2001년 정기국회는 검찰총장과 국정원장 인사청문회 건으로 파행, 예결소위 구성방식에 대한 얘기조차 꺼내지 못했다. 2003년은 노무현 대통령이 측근비리특검 요구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한나라당이 등원거부로 맞서는 대치정국이 형성됐다.
시민행동 정창수 국장은 “정쟁으로 인해 심의기간이 짧아져 겉핥기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면서 “법을 만드는 국회가 법을 무시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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