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행동이 산업자원부장관께 드리는 공개서한>
요금을 못 냈다고 전기를 끊어버리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국민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함께하는 시민행동'이라는 시민단체입니다.
공무에 여념이 없으실 줄 압니다만, 장관께서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조치해 주셔야만 할 사안이 있어 한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희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요금연체시 강제 단전조치의 반인권성과 비인간성을 깊이 인식하고,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이러한 행위를 최소화 내지 폐지할 수 있도록 관련규정의 개정 등 개선조치를 취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장관께서도 최근 요금연체로 전기가 끊긴 채 촛불을 켜놓고 생활하다 화재가 발생하여 가족 중 2명이 사망하는 변을 당한 한 장애인 가족의 소식을 들으셨을 줄 압니다. 물론 이 사건이 직접적으로 단전조치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인과 유가족이 끝이 보이지 않는 빈곤과 장애의 어려움 속에 처해있을 때 국가가 이들을 도울 실질적 방안을 찾기는커녕 현대문명사회의 필수적 생활수단인 전기공급을 중단함으로써 당장 최소한의 정상적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하였음을 생각하면, 많은 국민들이 마치 국가가 이 사건을 일으킨 주범인 양 분노하는 것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직접적 원인은 과실로 인해 발생한 화재일지 모르지만, 이 추운 겨울날 전등을 켤 수도 없고 난방도 불가능한 춥고 캄캄한 방안에서 촛불 한 자루 켜놓고 있었을 그들의 심정을 상상해보면, 심적으로 그들은 이미 죽음과 같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관께서도 이 일을 알고 관련부처의 장으로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고민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그럼에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굳이 다시 들추면서 편지까지 띄우게 된 것은 이 땅에서 다시는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권한과 의무가 장관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강제 단전조치의 근거는 한국전력공사가 시행하고 있는 전기공급약관인데, 이 약관의 승인권은 산업자원부가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실상 산업자원부의 정책결정에 따라 약관이 제정되고 한전은 이를 시행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미 지난해말 산업자원부에서는 강제 단전조치로 인한 심각한 사회문제 발생에 대한 대책으로서 전기약관 일부를 개정하여 '주거용 고객에 대해서는 요금을 연체하더라도 혹한·혹서기에는 단전조치를 유예할 수 있도록' 한 바 있으며, 이에 대해 저희 단체는 환영의 뜻과 함께 보다 근본적인 개선조치(강제단전의 폐지)를 재차 촉구하였습니다. 당시 논평 내용은 덧붙인 저희 단체의 문서를 통해 자세히 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부의 개선조치는 강제단전의 인권침해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조치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단지 국민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과 저소득층의 피해를 조금이나마 감소시킬 수 있으리라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요금연체를 사유로 하는 강제 단전조치의 심각한 인권침해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단체는 이미 2003년 8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요금연체시의 강제 단전·단수조치가 국민의 생존권과 헌법상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이고, 국가의 중대한 의무를 방기하는 행위이며, 채권자로서의 정당한 권한행사의 범위를 벗어난 과도한 부당행위라는 점 등을 근거로 공개진정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저희가 강제 단전조치를 중대한 인권침해행위로 보는 논리적 근거를 아실 수 있는 위 진정서 역시 함께 보내드리오니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강제 단전·단수조치와 같은 반인권적·비인간적 제도가 존재하는 것이 정부당국만의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저희는 이러한 제도가 존재하고, 실제로 매년 주로 저소득층인 전기·수도요금 연체자들이 전기, 수도 공급을 받지 못해 일체의 문명기기를 사용할 수 없고, 식수를 걱정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에 처해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간과해온 저희와 같은 시민운동가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희가 장관께 이러한 서한을 드리는 것은 누구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현 제도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아야 하는 우리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위헌적 요소가 크다는 사실을 직접 설명드려 우리 모두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온 잘못된 제도가 이제라도 하루 빨리 고쳐지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마도 정부로서는 강제 단전·단수조치의 인권침해성을 인식하더라도 요금징수율 감소, 악의적 연체행위 증가 등 여러 부작용을 우려하여 쉽게 연체요금을 징수할 수 있는 이 제도를 없애는 데 주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와 이 제도를 없앰으로써 생기는 부작용 중 어느 쪽이 보다 중요하며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생각해볼 때 그 답은 분명하리라 확신합니다. 연체요금을 징수할 수 있는 방법은 정당한 채권행사의 범위 내에 있는 여러 가지 합법적 수단을 활용하면 족할 것이며,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요금을 받아내기 위해 국민의 신체건강은 물론 생명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훗날 현행 강제 단전·단수제도가 틀림없이 작은 이익을 취하고자 국가의 근본적 존재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어리석은 정책으로 평가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관께서 현명한 판단을 하시리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2월 13일
『시민행동』
공동대표 이필상 정상용 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