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최하고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이 후원하는 연속기획 <헌법 다시보기>가 27일(수) 오후 2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첫 번째 순서인 “문화의 눈으로 헌법 다시보기” 공개토론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날 토론에서는 헌법 제9조 "민족문화 창달, 전통문화 계승·발전" 조항의 해석이나 변경 필요성과 관련된 논의들이 이루어졌고, 인격권과 문화권의 신설에 대한 제안도 이루어졌다.
<헌법 다시보기> 연속 기획은 지구화·정보화 등의 거대한 변화와 성·생태·평화·문화 등 시민사회의 새로운 가치들이 부상하는 가운데, ‘헌법’을 매개로 하여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그려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련되었다.
인격권 신설, 문화국가 조항의 적극적 해석과 변경 제안 등 다양한 논의
첫 번째 순서인 “문화의 눈으로 헌법 다시보기”는 모두 세 사람의 발표가 준비되었다. <‘문화국가론’의 관점에서 본 헌법>을 주제로 발표하는 김수갑 교수(충북대 법대)는 문화국가론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국가가 문화적 자율성을 이유로 문화에 대한 모든 영향을 포기하고 문화를 사회에 떠맡기는 것이야말로 문화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라면서도, “국가의 기여는 어디까지나 대다수 사람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특정한 문화적 경향에 대한 일방적 지원이나 배제 등 특정한 방향으로 문화의 발전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며 한계를 명확히 한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적 자율성을 해치는 사전검열이나 허가 등은 도입되어서는 안 되며, 특정 문화 영역에 대한 지원이나 사후 규제에 대한 판단, 결정 역시 문화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구성되는 전문가 위원회 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는 또한 우리 헌법 9조의 문화국가 조항에 대해서는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우선순위를 명시한 것”으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수정·재해석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고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 동질성 형성을 통해 정치적 이질성을 극복함으로써 민족 통일의 계기를 마련하는 과제를 담고 있다”고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헌법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을 발표하는 임상혁 변호사는 최근 인터넷의 등장이라는 환경 변화에 비추어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사이의 관계를 검토한다. 그는 “과거에는 미디어의 발달과 경쟁으로 인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현재는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개인 뿐 아니라 무관한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피해를 보게 되며, 단시간 내에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피해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는 대안으로 헌법 차원에서 인격권을 명확히 규정하여 권리를 실질화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다만 인격권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가 형해화되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점도 지적한다. 관련하여 최근 제기되는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서도 “제도의 도입을 서두르기보다는 인격권과 표현의 자유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와 토론을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견해를 밝혔다.
마지막 발표자인 박신의 교수(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는 역대 정부의 문화정책을 개괄하면서, 과거 권위주의 국가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국가 정통성 수립’ 및 반공이나 경제성장 같은 지배이데올로기의 확산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본다. 헌법 9조에 대해서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된 조항으로 해석하고, 문화적 다양성이나 역동성을 첨가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또한 문화예술의 철학적 가치와 이념과 함께, 문화권, 문화예술 활동의 주체 등도 명시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는 더 나아가 문화 관련 조항들 뿐 아니라 헌법 전반에 대해 문화적으로 다시 접근하고 기술해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럴 경우 “국토균형발전(제122조)이나 지역경제발전(123조)도 개발논리를 벗어나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환경 조성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평화나 통일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단일한 개체나 단위가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에 녹아나는 원리로서의 개념, 즉 통합적 개념으로서의 문화를 통해 사회 전체를 인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문화적 시도인 것이다.
이어서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양현미 실장과 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 전효관 대표의 토론이 이어졌다. 양현미 실장 또한 제9조에 문화다양성 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문화권을 독자적인 헌법 조항으로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다. 또 사회복지(제34조)와 환경보호(제35조)에 각각 문화복지 및 문화환경 개념을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전효관 대표는 문화 개념으로 헌법을 다시본다는 것이 삶과 사회 전반을 재구성하자는 매우 급진적인 제안이며, 권력구조 중심의 일방적 헌법 논의를 비판하고 개입하는 효과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실제로 문화적 권리를 만들어내고 확장하는 일상적 실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탁상공론에 그칠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한편 청중석에서 토론을 지켜본 국민대 법대 이광택 교수는 “문화관련 조항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헌법의 권력구조나 경제원리가 우리 문화에 적합한 것인지를 따져보는 문화인류학적 시각의 헌법 검토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또, 민주노동당 윤현식 정책연구원은 “국가보안법이나 신자유주의적 산업논리에 대응할 수 있는 문화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날 공개토론회의 자료집 및 보도자료, 토론자들의 토론문은 첨부파일을 내려받으면 볼 수 있다. 한편, <문화의 눈으로 헌법 다시보기>에 이어 다음 달 24일(수)와 26일(금)에 각각 제2회 <평화의 눈으로 헌법 다시보기>(장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당)와 제3회 <여성의 눈으로 헌법 다시보기>(장소 : 연세대학교 박물관 시청각실)가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