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예산의 낭비 소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미국 등 선진국에선 세금을 낸 국민들이 직접 감독하고 경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예산 과정 전반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제도 도입에 들어갔으나 ‘낭비 행위자에게는 관대하고, 제보자에게는 냉정한’ 기본 틀은 바뀌지 않고 있다.

“납세자는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

2000년 10월 경기 하남시민 266명이 하남시장을 상대로 낸 소송이 법원에서 각하됐다. 재판의 이름은 ‘정부보조금 지급결정 무효확인 청구소송’. 시민들은 1999년 9월부터 12월까지 하남시 주최 국제환경박람회가 1백86억원의 적자를 내고도 이듬해 다시 1백30억원을 들여 행사를 준비하려 하자 제동을 걸고 나섰던 것이다. 감사원과 환경부 등의 감사 결과 재원 확보가 불투명한데도 오히려 행사규모를 확대했고, 영수증·증빙서류 미비 등 사업이 투명하지 못했던 것으로 지적됐다. 하지만 법원은 “시(市) 재정에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하남시민 개개인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상 이익이 침해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민들의 소송 제기권을 명문화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 주민소송제도가 2006년부터 시행되면 지방자치단체의 잘못된 예산 집행에 대한 견제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에 비해 소송절차가 복잡하고 소송대상도 제한돼 있다.

우리의 주민소송제도는 소송 원고가 주민 1명이면 되는 미국·일본과 달리 광역시·도의 경우 500명, 인구 50만명 이상 대도시 300명, 시·군·구는 200명이 되어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예산을 위법하게 집행한 공직자에 대해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환수된 세금의 일부를 보상금으로 지급하지만 우리는 법원 손해배상결정 이후에 지자체장이나 지방의회 의장이 다시 청구하는 이중구조로 돼 있다.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공직자에 대한 직접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할 경우 소송 남발과 함께 업무 자세가 경직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창수 국장은 “복잡한 절차로 인해 환수가 지연될 수밖에 없다”며 “문제가 된 공무원 또는 업체에 재산을 은닉시킬 수 있는 시간만 벌게 해주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법안 내용이 개악됐다는 점이다. 소송이 가능한 원고 수를 늘려놓았을 뿐 아니라 주민소송의 전 단계인 감사청구 시한도 ‘사유 발생후 5년’에서 ‘2년’으로 단축시켰다. 국회가 오히려 시민의 감시활동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1인 소송·직접 손해배상청구’를 골자로 하는 납세자소송특별법은 지난 16대 국회에서 자동폐기됐다가 17대 국회에 수정 제출됐다.

반면 예산 누수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고발한 공익제보자들에 대한 보호 장치는 부실하다. 2002년 부패방지위원회(부방위) 출범 이후 지난해 말까지 접수된 부패신고는 343건. 이중 24명이 소속기관으로부터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물론 기밀누설·허위사실유포 등의 이유로 수사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안산시가 종합운동장을 건설하면서 불필요한 실시설계비 38억원을 집행한 사실을 신고한 김봉구씨(49)는 인사위원회 심의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동사무소로, 다시 상수도사업소로 인사배치됐다. 김씨는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한 선의의 신고였지만 배신자 취급을 당하며 명예가 무참히 짓밟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합리한 인사전횡에 대해 부방위가 내릴 수 있는 처분은 과태료 부과와 징계처분요구 정도가 전부다. 시정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강제할 수단이 없다. 이러한 문제점이 드러나자 부방위는 보복인사 행위자를 형사처벌(징역 1년·벌금 1천만원 이하)할 수 있도록 뒤늦게 법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공공기관의 예산 운영에 일반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길도 비좁다. 참여연대의 경우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거쳐 서울시의 판공비 사용내역서를 공개하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 투명사회팀 전진한 간사는 “법원의 결정 이후에도 차일피일 미루는 지연전략으로 전체 요구량의 10분의 1만 공개한 데다 판공비 사용 목적 등을 알기 어려운 부실한 자료들이었다”고 꼬집었다. 시민자치정책센터 하승수 변호사는 “예산 낭비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선 내부자의 공익제보와 정보공개 확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시민감시권도 중앙정부와 공기업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권석천·조현철·정유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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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입안 단계부터 타당성등 분석해야”

최근 정책 실패에 따른 예산낭비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 경우 규모가 엄청날 뿐 아니라 후유증도 오래 간다. 사업을 중단하기로 한 경인운하 개발이나 새만금 간척사업을 보면 이미 투입된 자금의 낭비는 물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도 치르게 한다. 이용도가 낮은 지방공항은 건설 투자비뿐 아니라 완공 후에 들어가는 유지 관리비도 문제가 된다.

이러한 예산 낭비는 좀더 세심한 정책 설계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 우선 예산 배분이 ‘힘의 논리’에 따라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합리적 분석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뿌리내려야 한다.

아울러 예산 담당자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사업효과를 충분히 검토하는 사전 조정과정을 발전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정보화 관련 예산이나 과학기술 관련 연구개발 사업은 관련 전문가들이 먼저 장기적인 기술발전 흐름을 예측하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요즘에는 법적 근거를 갖고 예산이 집행되는 경우가 많다. 복지사업의 경우 법에서 일정한 자격을 정하고 여기에 맞으면 의무적으로 집행을 하도록 하고 있다. 경직성 경비가 결국 재정의 주름이 되고 만성적 적자의 요인이 되는 만큼 법안을 통과시킬 때는 반드시 기획예산처 예산실과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심의를 받도록 해야 한다.

재정 투·융자 사업에 대해선 엄격한 비용편익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민간기업은 투자를 잘못하면 망한다. 그러나 정부는 세금으로 사업을 하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예산을 ‘일년 벌어 일년 먹고 사는 일회성의 자금 지출’로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이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 이제 정부 투자사업에 대해서도 민간부문처럼 투자 대비 회수(ROI:Return On Investment) 비율을 적용해 성과를 관리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인식전환을 위해 예산운영에 생애주기관리(life cycle management)의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의 예산은 출생이 비밀에 싸여 있다. 누가 왜 집행했는지를 알 수 없고, 결과를 알 수 없다. 예산 배정에 앞서 정책설계가 맞는지 치밀하게 검토하고, 집행에 앞서 성과 목표를 관리하는 체계의 정비를 통해 국민 혈세가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원희/경실련 예산감시위원장·한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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