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자연재해 등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해 ‘비상금’ 성격의 예비비를 매년 예산에 책정해두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각 부처의 일상경비 부족분을 메우는 데 들어가기 일쑤다. 예비비 사용시 대통령 승인만 거치면 되는데다 국회 결산도 겉핥기에 그치는 탓에 제2, 제3의 쌈짓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화요금이 연체되었사오니….”

매년 이맘때가 되면 법무부의 일부 부서에는 전화요금 납부를 독촉하는 자동음성 전화가 걸려오곤 한다. 때로는 ‘전기요금을 계속 연체하면 전기가 끊길 수 있다’는 고지서가 날라오기도 한다. 공공요금 연체료로 나가는 돈만 연간 수천만원. 그러나 직원들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일이에요. 예산 절약 얘기만 나오면 공공요금부터 아껴써야 한다고 하니…이젠 독촉장이 날아와도 그러려니 합니다.”

법무부의 태연한 표정은 든든한 예비비 덕분이다. 공공요금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2002년 66억원, 지난해 1백34억원을 긴급 수혈받은 데 이어 올해에도 1백18억원의 예비비 지급을 요청해놓은 상태다. 최근 3년간 부족액 규모가 전체 공공요금의 30~40%에 이른다.

“교도소 시설 현대화와 검찰 조직 신설에 따라 공공요금이 계속 늘고 있다”는 게 법무부와 기획예산처의 공식 설명이다. 하지만 매년 ‘펑크’를 내야 할 정도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일까. 법무부 관계자는 “우리도 예비비를 쓰고 싶지 않지만, 공공요금 인상폭이 제한돼 있어 부처 내부 사정에 따라 늘리긴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법무부는 또 ▲신임 검사·일반직의 4개월치 봉급 ▲기능직 근속승진에 따른 인상분 ▲명예퇴직 수당 부족 등으로 인건비 1백21억원이 부족해지자 예비비에서 76억원을 받아갔다. 관행적인 예비비 의존은 형사보상금·범죄피해자구조금에서도 나타난다. 법무부는 지난해 일반회계에 관련 예산 11억8천만원을 편성했지만 다시 예비비에서 14억5천만원을 타갔다. 공공요금이나 인건비, 보상금·구조금 모두 어차피 지출할 돈이란 점에서 “굳이 관련 예산을 충분히 잡아놓아 다른 사업비들이 줄어드는 결과를 빚지 않으려는 속셈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주먹구구로 예산을 편성한 뒤 예비비에서 빼다쓰는 모습은 보건복지부도 다르지 않다.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이후 매년 3백억~5백50억원씩의 급여가 모자라 기획예산처에 손을 벌리고 있다. 급여 대상자의 평균 소득이 매년 3%씩 증가하는 것을 전제로 예산을 편성하는 탓에 실제 지급액이 번번이 예측치를 넘어선다.



복지부는 “지급대상이 연간 1백40만명이어서 소득을 정확하게 추산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국회 보건복지위 관계자는 “그런 식의 논리라면 어떤 예산이든 미리 짤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며 “매번 틀리는 급여 추산 방식을 왜 바꾸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예비비 사용에 별 거리낌이 없다보니 같은 목적의 부동산을 중복 구입하는 데 예비비가 들어가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통일부는 지난해 12월24일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청사 부지를 매입하기 위한 중도금이 필요하다”며 예비비 1백74억원을 집행했다.

그러나 불과 닷새 전 서울 구기동에 남북회담청사 예정 부지를 매입한 상태였다. 통일부는 “현재 청사가 있는 삼청동 임대토지 매입에 나섰으나 소유주가 가격을 너무 높게 불러 구기동 대체부지를 매입키로 했다”며 “그런데 법원에서 삼청동 부지에 대한 매매가 강제조정 결정을 내려 다시 방향을 바꾼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처럼 각 부처가 곶감 빼먹듯이 타다 쓰는데다 태풍 등에 따른 추경 편성으로 예비비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01년까지 2조원대에 머물렀으나 2002년 6조1천억원, 지난해 4조원으로 급증했다. 지난 5년간 일반회계 예산액 대비 예비비 비율은 평균 3.46%로 일본 수준(1999~2002년 평균 0.74%)을 크게 웃돌고 있다.

내년도 예산안에도 공무원 봉급조정수당 1천5백억원이 예비비로 책정됐다. 당초 올해로 정했던 수당 지급 종료 시한을 어물쩍 연장한 것. “민간기업과의 임금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2001년부터 한시적 시행에 들어갔으나 올해 97.7%로 100%를 완전히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반면 예비비 집행에 대한 심의가 하루 이틀에 그치는 등 국회의 감시망은 헐겁기만 하다. 오히려 예비비 활용에 눈독을 들이는 상황이다. 열린우리당 홍재형 정책위원장은 지난 1일 경제장관 오찬간담회 직후 가진 브리핑에서 “정보기술(IT)분야에서도 적극적인 뉴딜정책을 펴야 한다”며 “각 부처가 프로젝트를 개발하면 올해 예비비를 지원해서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정부가 급조한 정책에 비상금을 쓰겠다는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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