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예산안을 확정짓기에 앞서 정부와 여당은 당정(黨政)회의를 갖는다. 예산에 집권여당의 정책 의지를 반영토록 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나라살림을 알뜰하게 꾸려가자는 고민보다는 여당과 의원들의 ‘표밭 관리’에 더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 현안’ 사업을 끼워넣거나 사업비를 늘려 예산배분 원칙을 허무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지난달 10일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당정회의를 갖고 내년 예산규모를 올해보다 9.5% 증가한 1백31조5천억원으로 편성키로 합의했다. 내년도 적자 국채 발행 규모는 당초 3조원이었지만 열린우리당의 감세정책(세입 감소 2조5천억원)과 재정확대(추가 지출 1조3천억원) 요구에 따라 6조8천억원으로 늘게 됐다. 나라 빚 급증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마당에 국채 발행액을 2배 이상 늘려놓은 것이다.
엿새 뒤인 16일 국회의사당 내 열린우리당 정책위원장실. 홍재형 정책위원장과 김혁규·조경태 의원 등 부산·경남 출신 의원들이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김광림 재경부 차관, 장병완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부산시 관계자들과 마주앉았다. 내년 11월 부산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지원을 확정짓기 위한 추가 당정회의였다.
“제2회의장 건립에 따른 부경대 수산과학연구소 이전 등 8개 사업에 국비 6백47억원을…”
부산시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예산처는 즉각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국비 지원 없이 지자체 예산만으로 행사를 치르겠다는 유치조건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APEC 준비실사단이 회의장을 우리 계획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른 추가비용은 정부가 책임져야 합니다.”(부산시)
“부산시 요청을 들어줄 경우 원칙이 무너집니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형평성을 들어서 추가 예산배정을 요구할 겁니다.”(장병완 예산실장)
팽팽한 대치 속에 “주변도로 등은 건설교통부와 얘기가 다 돼 있다”, “국제행사 아니냐”는 등 부산·경남 의원들의 지원사격이 이어졌다. 정세균 예결위원장은 “8개 사업 중 4개는 정부가 지원하고 나머지는 추후 예산국회가 열리면 다시 논의하도록 하자”고 논란을 마무리지었다. 시청공무원들을 한달동안 서울에 상주시키며 의원 설득작업을 벌였던 부산시는 결국 3백35억원을 지원받게 됐다.
11월 예결위에서도 제2회의장 건립 명목으로 1백16억원의 추가 증액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열린우리당 이화영 제2정조위 부위원장은 “고위당정을 거쳐야 하지만, 부산·경남 지역에 생색을 한번 더 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조성래 의원은 “예결위원장의 내락을 받은 상태”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부산시가 요구중인 추가 예산 중에는 지난해 태풍 ‘매미’로 유실된 회의장 예정지 주변의 방파제 복구비용과 해풍피해 조경수의 식재사업이 포함돼 있다. 그동안 미뤄왔던 환경정비를 어물쩍 중앙정부 돈으로 처리하겠다는 발상이다.
이처럼 부산 지원이 이뤄지자 이번엔 제주도가 손을 벌리고 나섰다. 제주는 부산과의 유치 경쟁에서 탈락, 각료회담 등 일부 행사가 열리게 돼 있다. 제주 의원들은 당 정책위에 “예결위 심의를 통해 1백50억원의 예산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강창일 의원은 “부산과 형평성을 맞추려면 제주에도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주의 경우 ‘문화수도’ 사업과 관련, 아시아문화전당 건립 예산으로 내년에 1천31억원을 따냈다. 예산처측이 “사업 첫해이므로 1단계 부지매입비 5백억원 등 6백억원 규모가 적정하다”고 제시했으나 의원들은 “그 정도 돈으로 어느 세월에 부지를 매입하느냐”며 증액을 관철시켰다. 부처별 총액이 배정되는 톱다운제 시행 첫해에 예외적인 증액을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고도의 정치적 판단”앞에선 무력했다. 현재 토지 감정이 실시되지 않은 것은 물론, 예정 부지의 적정성을 둘러싼 논란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밖에 고속철도 오송역사 건립비 1백억원이 책정되는 등 크고 작은 물밑거래가 이뤄졌다. 홍재형 정책위원장과 변재일·노영민 의원 등 충청권 의원들은 강동석 건교부 장관을 찾아가 “신행정수도의 관문인 오송역을 호남선 분기점으로 해달라”며 역사 규모 확대를 주장했다. 정작 분기점 선정은 12월에 발표되는데, 예산부터 배정되는 셈이다.
이처럼 분별없는 ‘지역현안 끼워넣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민주당과 정부의 당정에서는 올 4월 총선을 앞두고 의원들의 지역구 민원이 쇄도했다. 충청권의 한 의원은 도로·상수도 등 ‘예산반영 요망사항’을 A4용지에 적어 당정회의장에 집어넣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일단 예산을 따오면 “지역구 살림을 키웠다”는 평가와 함께 표심잡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부산·광주 지원에 대해서도 “6·5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데 따른 열린우리당과 의원들의 다급함이 반영된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해당 지역에서는 ‘좋은 뉴스’일 수 있지만, 전체 국민 입장에선 그만큼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별취재팀|권석천·조현철·정유진기자〉
-부처·의원 ‘부적절한 딜’
“의원님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데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건설교통위 소속의 한 초선의원(열린우리당)은 지난달 의원회관 사무실로 찾아온 건교부 공무원으로부터 ‘이상한 제의’를 받았다. 필요한 지역구 사업이 있으면 예산에 반영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의원들은 일방적으로 예산배정을 요구하고, 정부 부처는 방어에 급급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산 편성과 심의 과정에서 각 부처는 자발적으로 의원들과 ‘악어와 악어새’ 관계가 되는 경우가 많다. 국회에 제출된 예산안이 심의과정에서 삭감 없이 통과되고, 한발 더 나아가 증액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소관 상임위와 예결위 의원들을 우군(友軍)으로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 공무원이 접촉하는 대상도 격에 따라 다르다.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의원들은 주로 장관과 차관이 담당하고, 의원 보좌관들은 기획관리실장이 맡는 것이 보통이다. 책정된 예산이 꼭 필요하다며 의원을 상대로 예산안 설명회를 가진 뒤 설명회 말미에 의원이 필요로 하는 지역구 사업에 대한 정보를 청취한다. “당 차원에서 별도로 취합한 뒤 기획예산처에 제출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 의원 보좌관은 전했다.
지역구 사업이라는 ‘당근’이 제시되면 이후 예산심의에서 분명히 ‘약발’이 나타난다. 3선 의원의 보좌관은 “지역에서는 의원이 얼마나 많은 예산을 따오는지가 역량 평가의 큰 잣대”라며 “지역예산의 우선순위를 부처에서 결정하다보니 의원들이 부처 논리에 예속되기 쉽다”고 털어놨다.
그나마 올 국회에서는 의원들의 지역구 민원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처음 예산국회를 경험하는 초선의원이 크게 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부처와의 ‘거래관행’을 아직 몰라서인지, 아니면 의정활동이 깨끗해질 조짐인지는 내년 국회에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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