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산안은 정부가 국민의 돈을 가져다가 어떤 일에 얼마를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정부가 국민의 돈을 가져다가 과연 적재적소에 적량을 사용하는가를 심사하는 것은 국민의 대표로 구성된 국회의 본질적인 기능, 즉 권한이자 의무에 속할 것입니다.
세계사 책을 보면 의회가 생긴 계기를 1300년경 영국에서 전쟁비용 충당을 위한 국민 대표의 동의를 얻기 위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독립전쟁의 계기가 되었던 보스턴 차 사건도 '대표없이 과세없다'라는 과세에 대한 국민 동의에서 촉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과세동의권과 함께 정부가 국민의 돈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예산심의권은 국회의 존립 기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예산심의가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적일 것입니다.
예산이 국회를 통과하고 나면 늘상 '졸속처리'니 '나눠먹기'니 하는 표현이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것도 국회의 예산심의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나타내는 것이겠지요.
예산심의 정도를 구체적인 수치로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정부에서 제출한 예산을 국회에서 며칠간 심의하였으며, 그 결과로서 얼마나 수정하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는 아래 <표>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표> 역대 예결위의 활동기간 및 예산조정 비율 평균 (단위: 일, %)
국회 | 예산심의기간 | 결산심사기간 | 국회수정비율 |
14대 (1992 - 1996) | 9.25 | 3.5 | 0.2 |
15대 (1996 - 2000) | 12.25 | 3 | 0.3 |
16대 (2000 - 2004) | 20 | 4.5 | 0.7 |
※ 16대 국회는 2000년도와 2001년도의 평균값임.
먼저 예결위의 예산심의와 결산심사에 투입된 기간을 보면 결산심사는 물론이고 예산심의 기간도 상당히 짧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법정 심의기간은 두 달이지만 실제로 심의한 기간은 그보다 훨씬 짧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으로 올수록 심의기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예산심의 기간이 짧다보니까 국회에서의 수정 비율이 1%도 채 안 돼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국회에서의 수정비율이 약 5% 정도라고 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물론 반드시 수정비율이 높아야만 예산심의가 충실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정비율이 아주 작다면, 예산심의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을 개연성은 높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역대 국회의 예산심의기간이 최근으로 올수록 길어진 것에 비례하여 예산안 수정비율도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국회의 예산심의가 충실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관련학자들과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비교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심의기간이 짧다, 정보가 부족하다, 전문성이 떨어진다, 정치논리가 우선한다 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만큼 개선방안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다른 의견은 있지만 큰 줄기는 대체로 유사합니다.
개선방안 중 대표적인 것들을 몇 개만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째, 예결산 심사일정을 개편하여 충분한 심사기간을 확보해야 한다.
둘 째,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전환하여 임기를 늘리고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셋 째, 예산공청회를 의무화하여 참여를 확대하고 계수조정소위원회를 공개하여 투명성과 높여야 한다.
넷 째, 국회의원의 전문성을 보완할 수 있는 지원조직을 대폭 보강해야 한다.
이러한 방안들은 충실한 예산심의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필요한 방안들이라고 생각되며, 17대 국회에서는 이런 개선안들이 현실화되길 기대합니다.
이 중에서 네 번째 개선안인 지원조직의 보강과 관련하여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는 금년부터 기능을 시작한 국회예산정책처에 대한 것입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바로 국회의원들의 예산심의를 지원하기 위하여 설립된 전문기관입니다. 이 기관의 역할에 대해 국회법은 '예산·결산 기금 및 재정운용과 관련된 사항에 관해 연구 분석·평가하고 의정활동을 지원하는 국회 지원기관'으로 규정하고 있어서, 이 기관의 주요 설립 목적이 국회의 충실한 예산심의를 지원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산정책처와 관련된 흥미있는 기사가 오늘 아침 신문에 실렸습니다. 예산정책처가 '정부의 재정운용계획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평가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행정부와 예산정책처의 경제 전망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가는 시간이 지나봐야 판가름 날 것입니다. 하지만 예산정책처가 재정운용에 대하여 정부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는 것 자체가 의회의 예산통제 기능 강화를 위하여 긍정적인 신호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예산정책처의 지원으로 확충된 예산정보와 향상된 전문성을 바탕으로 충실한 예산심의가 이루어지질 기대합니다.
기존의 예산심의를 평가하고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17대 국회의 첫 번째 예산심의가 어떻게 하면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보다 충실한 예산심의를 위한 현실적인 조언으로서, 내년도 예산심의에서 무엇을 유심히 봐야 하는가에 대하여 언급하려 합니다.
예산심의에서 검토해야 할 사항은 예결위와 상임위가 서로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예산편성기준, 총괄예산, 사업비의 세 항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산편성기준에서는 ① 예산편성 기본방향의 경제·재정정책 방향과의 부합성, ② 예산편성 전제인 경제성장률 등 국내외 경제여건 전망의 타당성 ③ 각종 기준단가 책정의 적절성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서는 특히 경제성장률 예측의 타당성, 국가채무관리계획의 실현가능성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내년은 물론 향후 5년간의 경제성장률을 5%대로 예측하고 있지만, IMF와 ADB등 국제기관, 삼성경제연구소 등 민간연구기관, 국회예산정책처, 한국은행 등 정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경제전문기관에서는 경제성장률을 이보다 낮게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제부처의 수장은 경제성장률 전망은 수동적인 예측이 아닌, 적극적인 달성목표라고 합니다. 경제부처 수장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경제성장률에 따라 세수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예산운용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보다 정확한 예측이 필요함은 물론입니다.
다음으로 총괄예산에서는 ① 예산 규모의 적정성 ② 분야별 재원 배분의 타당성 ③ 법률 제개정 필요예산 (법률의 제개정을 전제로 한 편성인 경우 국회 통과 안 될 때의 대책)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내년도 예산규모를 보면 적자재정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적자, 균형, 긴축 재정 중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는 경제상황과 재정여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내년도 예산이 적자재정으로 편성된 것을 반드시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적자재정 편성규모가 타당한가는 엄격하게 따져야겠지요.
국가채무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걱정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채무'에 대한 것입니다. 세수가 따라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재정지출을 확대하려면 빚을 질 수밖에, 즉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채발행을 확대하면 국가채무가 증가하므로 국회나 언론에서 문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명시적인 국가채무를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재정지출을 확대할 방안을 찾고 싶어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것으로 가능한 것이 연기금의 여유자금을 사용한다던가, 민간의 사회간접자본투자를 끌어온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물론 명시적인 국가채무에는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기금의 자금을 사용하면 결국은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합니다. 민간의 SOC 투자는 정부가 수익을 보장하는 경우, 즉 손실이 발생하면 메꿔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천 신공항고속도로의 경우 2001-2003까지 지급된 손실 보전비용이 2,936억원이라고 하고, 작년에 운영된 천안-논산 고속도로도 500억 정도의 국고 지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앞으로 민간투자법이 개정되면 교육·복지 분야에도 민간투자를 유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육·복지 분야는 도로나 항만 같은 일반 SOC 분야보다 수익 발생이 더 어려운 분야입니다. 따라서 정부의 손실보전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비록 명시적인 채무는 아니지만 정부가 부담의무를 갖는 재정행위에 대해서는 국회의 통제가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 명시적 채무보다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국회의 감시가 요구될 것입니다. 예산규모 얘기를 하다가 채무문제가 나오면서 말이 길어졌군요.
자원배분의 타당성에는 가치가 개입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지만, 최소한 중장기적인 비전과 계획 하에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따져 봐야 할 것입니다. 법률 제개정 필요예산의 경우 내년도 예산을 보면 담배소비세 인상을 전제로 짠 예산사업들이 몇 개 보이더군요.
한편 사업비는 사업의 타당성과 소요비용 산정의 적절성을 검토해야 하는 것인데 신규사업과 계속 사업의 검토 중점사항이 약간 다릅니다.
신규사업의 경우는 ① 중장기계획과의 연계성, ② 사업의 우선순위와 비용효과성, ③ 타당성조사, 용지보상협의 등 사전절차 이행 여부, ④ 재원조달계획의 타당성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사업의 경우는 ① 당초계획의 변경 여부 및 변경 사유 ② 재원조달계획 및 실적 ③ 당해 연도 투자액 배분의 타당성 및 사업계획의 일치성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별 사업비와 관련하여 내년도 예산에서는 특히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사업들의 타당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개별 사업이 지역구 숙원사업인 경우 이 사업들의 타당성을 공정하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본분은 나라 살림을 챙기는 것이며, 지역구 사업을 챙기는 것은 지방의회의원의 몫입니다.
현실적인 제약은 이해하지만, 기왕이면 지역의 이익보다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시작될 예산심의는 17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예산심의입니다. 17대 국회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기에 이전의 국회와는 달리 많은 기대를 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17대 국회의원들의 정성과 노력 속에 충실한 예산심의가 이루어지고, 이를 통하여 보다 나아진 나라살림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랍니다.
- 김태일 (함께하는시민행동 예산감시위원 / 고려대 행정학과)
* 이 글은 국회 요청에 따라 2004년 10월 국회보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