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인 우리의 관념 속에 정치는 나쁜 것, 부패한 것 등의 부정적 담론들로 새겨져 있다. 정치권 부정부패사건이 터지기 시작하면 연일 검찰과 언론은 정치인의 부도덕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대서특필하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에 시민단체들까지 가세하면 정치권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버린다. 몇몇 정치인이 구속되고, 의기양양했던 검찰의 목소리도 누그러지고, 언론도 더 이상 뉴스가치를 찾지 못하면 정치인 부패문제는 어는 덧 세간의 이슈에서 사라지고, 우리들 머리속에는 다시금 정치는 나쁜 것이야, 그런 놈들이나 하는 것이지라는 유형의 명제가 한층 더 쌓여진다.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투표’를 하러간다.
그러나 정치는 나쁜 것이 아니다. 어느 사회에서건 정치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정치를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가 외면해 버린 순간 우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민주화운동 회의론’이 그것이다. 소위 2:8 사회를 말한다. 민주화 이후 부자와 빈자의 구성비 차가 확대되면서 양극화사회로 치닫고 있다고 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한 사회구조가 이런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말이다. 과연 민주화 운동의 혜택은 누가 받은 것인가? 이런 내용들이 ‘민주화운동 회의론’의 일반적 내용이다. 여기에 ‘정치’의 부재가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정치인 팬클럽’을 통해 정치의 활성화를 추구하는 최소한의 우리 행동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서민이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은 ‘정치’가 있기 때문이다. 시장은 그 자체적으로 독점화의 경향성을 갖는다. 시장에서는 강자만이 살아남는 법칙이 존재한다. 시장만 있다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 새로이 시장에 진입해서 경쟁을 하고자 할 때 경쟁의 일부 조건만을 갖추어 진입이 어려운 사람들은 영원히 시장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제동을 거는 것이 ‘정치’다.
정치를 통해 국가권력을 형성하고, 국가는 시장의 자기 파괴적 경향성을 제어하면서 누구나 경쟁을 할 수 있는 조건, 누구나 시장에 진입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의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경쟁의 조건을 갖추도록 보호하는 행위를 한다. 사회복지, 사회정책, 분배정책들은 그러한 맥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은 정치가 실종되어 있다. 국회는 구성되어 있지만 야당들은 정치를 왜면하고 소위 ‘장외투쟁’적 행동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언론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 언론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특정 경향의 언론들에 의해 사회적 이익이 보호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보수언론이라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기득세력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주력한다. 성장 대 분배의 이분법적 접근을 통해 분배정책을 여론이라는 탈을 동원해서 원천봉쇄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서민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가 출범한 이래 서민의 이익이 보호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외면당한 원인은 이러한 맥락에 있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서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이다. 그런 정치를 우리 스스로 실종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정치 사이의 간극을 넓혀 온 담론 중 하나가 정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유포이다. 정치를 나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정치에 항상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가? 또 하나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정치적 중립성’ 테제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중간에 서기를 강요받아 왔고, 보편적인 행위를 강요받아 왔다. “국가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는 파당적인 것이다. 정치에 중립적인 것이란 없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회계층의 이익을 위해 정치가 서로 경쟁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지층에게 이익을 돌리는 것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전체의 이익이 보장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중립적 태도를 취하라고 강요하는 것, 그런 뉘앙스의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정치에 대해 시민의 거리두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럼 팬클럽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자신이 지지한 정치인에 대해 홍보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치인이 서민을 위한 정치를 약속했다면, 그 약속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문을 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어떤 발언을 했는지, 그 발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해 주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정책을 만들어서 추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도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두 사람 회원이 늘어나면 정치인과의 자연스러운 토론의 기회도 늘어날 수 있다.
인터넷 팬클럽은 정치인을 정점으로 작동되는 일종의 새로운 기획실이다. 정치인의 잘 못된 행동을 교정해 주어야 한다. 잘 못된 행동은 개인인간으로서 저지른 실수에 대한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도 인간인데 인간적인 실수를 할 수 있다. 너무 높은 도덕율을 가지고 정치인을 평가하지 말자는 것이다. 평가는 정치를 수행하는 태도가 지지자의 요구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평가여야 하며, 지지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평가여야 한다.
사실 사회가 100% 깨끗할 수 없다. 그런 사회가 결코 좋은 사회라고 평가되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의 부패는 존재한다. 어느 정도의 일탈적인 행위는 용인해주고 있다. 그 허용의 기준이 너무 낮아서도 안 되지만 또 너무 높아서도 안 된다. 그런 기준에 대한 고민 없이 타인의 행위에 대해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인터넷 팬클럽에서의 글쓰기는 그러한 신중함이 엿보였으면 좋겠다.
노사모와 같은 팬클럽을 꿈꿀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거대 조직으로 발전은 항상 가능하다. 그것

17대 총선을 살펴보면, 국회의원 후보자 1170명 중 85.4%인 999명이 선거용 사이트를 개설해 놓았다. 그리고 당선자 중 한나라당 소속의원 2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이트를 개설해 놓았다. 그런데 다른 분야들을 살펴보면, 후보자의 인터넷 홈페이지가 당락에 영향을 미쳤다는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는 17대 총선에서 인터넷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바로 ‘정치웹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각종 정치칼럼들이 올라오고, 그 칼럼들을 둘러싸고 리플을 통한 토론이 전개되고, 또한 주제토론방을 마련해서 엄청난 토론이 전개된 사이트들이 수두룩하다. 이것이 바로 전자적 공론장의 실체이다. 정치인 팬클럽도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정치웹진’으로서의 정치인 팬클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인은 부족한 것이 많다. 그래서 선뜻 우리 정치인을 만들기 어렵다. 그때는 정당을 봐야 한다. 그런데 정당을 봐도 그게 그건거 같이 느껴지고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다. 그때는 언론의 주장이나 보도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한동안 정치인과 정당을 스스로 살펴보라. 무엇인가 지지하고 싶은 건덕지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과감하게 한번 행동해볼 필요가 있다.
2004년 17대 총선에 출마한 후보자 중 98명인 8.4%가 팬클럽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소위 자가발전형 팬클럽도 상당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다. 자가발전이던 자연발생적 탄생이던 팬클럽이 작동되는 것 자체가 정치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정치를 살려야 인터넷 정치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1. 인터넷 정치참여의 첫걸음은 무엇인가?
http://data.action.or.kr/info/?doc=bbs/gnuboard.php&bo_table=school_18&page=1&wr_id=1
2. 인터넷 정치, 환상을 버리자.
http://data.action.or.kr/info/?doc=bbs/gnuboard.php&bo_table=school_18&page=1&wr_id=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