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가 무너지기 전까지 세상의 미래에 대한 담론은 상당히 간결한 편이었다. 철학은 비교적 간결했다. 포이에르바하의 테제의 당위대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복무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방식의 자본주의 사회의 우수성을 선전할 것인가의 두 가지가 철학계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적과 동지, 피아,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간결했다. 모든 대중적 토론은 그야말로 선동적이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사회주의를 찬성하는 겁니까 반대하는 겁니까? 사회주의자로 알려져있던 찰리 채플린에게 매카시 열풍 한 가운데서 던져진 질문 역시 간결하기 짝이 없다. 공산주의를 찬성하지요? 그러니까 당신의 영화를 사회주의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신 거 맞지요?

이렇게 간단한 질문 틈 사이로 지구의 미래에 대한 70년대의 질문은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아, 우린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그런 건 잘 모르구요, 이런 식으로 가다간 금방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거라는건 좀 알아요. 여성주의의 질문 역시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는 도발적이고, 대답하기가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하여간 남정네들이 앉아서 생각하는 일이라고는 전쟁이나 살인 아니면 무기 같은 거 밖에 없다니까...

90년대를 풍미했던 브리티시 팝의 선두주자 중 하나인 크렌베리스의 좀비라는 반전 음악은 이러한 여성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다. ‘네 머리 속에는 좀비가 들어가 있어(in your head, zombie), 넌 전쟁만 생각해...’

이런 시각 속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관한 논쟁은 그야말로 좀비들의 논쟁 같은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아니, 이 지구상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라는 문제 밖에 없단 말이야?

이런 치기어린 주장들은 낭만적 생태주의자들의 질문 혹은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악에 받친 여성주의자들의 생소리 정도로만 간주하던 것이 80년대까지의 상황이었다. 남성주의적인 패권주의가 지배하던 70~80년대까지의 세계적 논쟁에서 생태, 여성, 인권 등의 생산으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는 문제들은 히피들의 치기어린 반항 정도로 치부되고, 시장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들의 주장같은 것으로 쉽게 오해받기 쉬었다.

동구의 몰락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권주의적 철학의 몰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고 어떻게 진보와 발전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있지라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한 마디도 진전시킬 수 없는 사상적 공황에 빠져들어가고, 이 가운데에서 그야말로 ‘미래’라는 단 한 마디를 꺼낼 수 없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9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세계화는 이러한 사상적 공황에 불을 지피게 된다.

세계가 이제부터는 하나가 된대! 어머, 정말 좋겠다, 그럼...

세계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자본의 위대한 힘에 대해서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주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틀을 통해서 금융자본이 그 어느 때보다 막대한 힘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조금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정보화와 인터넷의 우수성에 대한 학고한 신념으로 바로 이런 것이 민주주의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정보 민주주의?

그 반대편의 진영은 한편으로는 세계화라는 큰 흐름에 대해서, 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또 다른 대척점을 찾으려고 하지만,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세계화의 또 다른 얼굴 속에 숨겨진 힘의 본질을 잘 찾기 어려워하면서, 도대체 제 3세계라는 세상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란 말인가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 21세기가 열리면서 사람들이 자산으로 20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세상에 대한 단면이다.

반자본(anti-capital)이라는 구호와 비시장 (non market)이라는 문제의식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대척점이다. 반자본이라는 구호는 자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폭압적 속성과 부등가 교환의 속성, 즉 착취라는 전통적인 문제점을 계승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시각 속에서 북구형 사회민주주의가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사회적 계약 혹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경제의 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결하자는 것이 대척점을 형성한다.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이론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론도 있다.

이와는 조금은 다른 구호로서 비시장(non market)이라는 문제점을 형성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있다. 칼 폴라니(Kark Polany) 혹은 마살 샬린스(M. Sahlins)와 같은 경제인류학 혹은 생태인류학의 접근에서부터 사상적 기원을 받은 이러한 시도는 대개는 ‘경제와 사회’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시장만으로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는 테제를 중심으로 이론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접근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자본론의 자본주의 붕괴라는 테제를 가지지 않고도 현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폭력적 상황에 대해서 고발할 수 있고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단점은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답하기가 어렵다. 자본주의? 그렇게 어려운 건 우린 모르고, 다만 지금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몇 가지 비시장적 기구에 대해서는 제안할 수 있지...

반자본일 것인가, 비시장일 것인가?

한국 사회도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대해서 예외가 아니므로, 질문의 대척점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반자본의 질문을 하는 순간 기업과 노동자 사이의 갈등과 모순관계에 대해서 보다 많은 방점을 찍게 되고, 비시장이라는 질문을 하는 순간 시장에 대해서 비시장적 관계 혹은 시장에 대한 보완적 관계를 통한 일련의 시민사회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물론 기계적으로 반자본 혹은 비시장이라는 질문을 통해서 양자를 분류하는 접근은 너무나 기계적이고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만나게 된다. 분명히 삼투하고 보완하는 관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주노동당은 반자본이라는 질문에 조금 더 천착하는 정치적 흐름이라고 한다면, 초록정치는 비시장이라는 질문에 조금 더 천착하는 정치적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보수정치가 대한민국의 건설과 승계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한나라당 세력과 개혁을 모토로 하는 열린우리당 세력으로 분화하는 것만큼, 반보수 정치지평도 반자본과 비시장이라는 두 가지 테제를 중심으로 분화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대립하면서도 공간과 자본, 기업을 중심으로 이해가 모아지는 것처럼, 반자본과 비시장이라는 질문도 진보와 저항이라는 측면에서의 공통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 생태와 여성 그리고 이렇게 형성화하기 어려운 지방자치와 토호와의 전쟁에서는 우선순위와 접근방식에서 자연스러운 차이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에 정치적 접근 자체를 배제하고 순수한 해방을 강조하는 또 다른 세력들은 무정부주의와 비정치적 접근으로 분화하거나 발전하게 된다.

반자본이든 비시장이든, 한국 사회에서의 질문은 중앙의 권력 그리고 지방의 토호라는 골동의 적을 가지고, 이를 은밀하게 지휘하는 기업세력과 관료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

이 글은 시민행동의 [인터넷시민학교]에 진행중인 강좌 "차가운 세상에서 情의 세상으로"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에 실린 글입니다.
ġ ϴ ൿ! Բϴ ùൿ ȸ ȳ
List of Articles

시장사회의 미래 1 : 반자본인가, 반시장인가? 성명/논평/보도자료

동구가 무너지기 전까지 세상의 미래에 대한 담론은 상당히 간결한 편이었다. 철학은 비교적 간결했다. 포이에르바하의 테제의 당위대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복무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방식의 자본주의 사회의 우수성을 선전할 것인가의 두 가지가 철학계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적과 동지, 피아,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 시민행동
  • 조회 수 1809
  • 2004-08-03

휴가는 제대로 즐기고 계신지요? 변두리편집장

가장 많은 분들이 휴가에 들어가셨을 기간입니다. 시민행동 사무처도 다르지 않아서 이미 지난주에 몇명, 이번주에도 몇명이 휴가를 떠나서 사무실이 무척 한산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휴가에 들어가서도 사무실에 꼬박꼬박 나오는 (누군가는 꼬물꼬물 기어나온다는 표현을 합니다. ㅋㅋ) 이들이 있는가 하면, 상근활동가 CUG에는 휴가가는 일정들이 어김없이 올라와 있다는 ...

  • CAN
  • 조회 수 1244
  • 2004-08-02

휴가는 제대로 즐기고 계신지요? [1] 주간브리핑

가장 많은 분들이 휴가에 들어가셨을 기간입니다. 시민행동 사무처도 다르지 않아서 이미 지난주에 몇명, 이번주에도 몇명이 휴가를 떠나서 사무실이 무척 한산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휴가에 들어가서도 사무실에 꼬박꼬박 나오는 (누군가는 꼬물꼬물 기어나온다는 표현을 합니다. ㅋㅋ) 이들이 있는가 하면, 상근활동가 CUG에는 휴가가는 일정들이 어김없이 올라와 있다는 ...

  • CAN
  • 조회 수 1526
  • 2004-08-02

RFID에 대응하는 공동전선을 위하여 - 6 성명/논평/보도자료

RFID, 즉 무선전파인증에 대한 나무님의 글쓰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RFID에 대응할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벌써 6번째 글쓰기를 하고 계신데요. 이제 마지막 글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그 글이 끝나고 나면 어떤 대응전략이 나올지 궁금해집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나무님의 에피소드 01세상 - RFID에 대응하는 공동전선을 위하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글은 그...

  • 시민행동
  • 조회 수 1811
  • 2004-07-28

재인식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기업의 변화 : 제1회 워크샵 녹취록 [1] 성명/논평/보도자료

시민행동이 진행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연속 워크샵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사회의 역할" 그 첫번째 워크샵이 지난 21일 열렸습니다. 당일 발제된 내용과 토론 내용을 생생하게 지면중계합니다. ------------------------------------------------------------------------------------------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5회 연속기획 워크샵 /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사회의 역할 제1회 [재인식되는 기업...

  • 시민행동
  • 조회 수 3440
  • 2004-07-27

분류

전체 (2330)

최근 글

최근 덧글

일정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