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에서의 꿀꿀이녀석은 나이를 먹을대로 먹었습니다. 2002년, 시민행동이 '시민공간 여울'에 사무실을 얻었을 때 누군가 집들이날 안고 왔었던 이 돼지 한 마리.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파란만장한 여울 시대를 접고 나루로 옮겨온 후로도 여전히 녀석은 사무실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녀석의 역할은 그러니까, 방문자들로부터 효과적으로 "삥"을 뜯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마술사도 보조가 필요하듯, 삥이라는 심오한 세계에도 조수가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처음 사무실을 들르는 사람이건,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겠다고 찾아온 지인이건, 회의하러 오신 손님이건 시민행동 사무실을 찾는 분들은 대개 앞쪽에 있는 테이블 앞에 앉게 마련이고, 녀석은 바로 그 정면에 서서 귀여운 얼굴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나도모르게 "이 돼지는 뭐에요?" 라고 묻는 순간, 곧바로 삥은 시작되지요.
"저희 점심먹을 반찬값 모으는 저금통이에요"
"사무실 사람들이 잔돈 생기면 넣기도 하고, 들르시는 분들이 기념삼아 한 푼 두 푼 넣어주시기도 해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어쩐지 자신도 좀 보태야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사방에 초롱초롱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동전만 넣기는 좀 무안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생각지 못한 출혈의 흔적만이...

또 다른 형태의 삥뜯기는 별별 형태로 만들어지는 패널티들. 중요한 회의에 늦었다고 얼마씩 벌금을 매기거나, 너무 오랜만에 왔다며 또 벌금을 매기거나, 심지어 호주머니가 무거워 보인다며 속에 든 동전을 강탈(!)당하는 일도 벌어진 적이 있다는 믿거나말거나한 사연들...

그렇게 긴 세월 조금씩 배을 채워온 녀석의 배는 딱 두번 비워졌습니다. 첫번째가 2005년 사무처 제주여행때 모자란 여비를 채워보겠다고 갈랐던 때. 그때는 정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삥에 동참했기에 무척 두둑했었는데, 그 뒤로는 관심이 뚝 떨어져 아주 간간이 수입이 있었고 아무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 녀석을 이번에 털어낸 건 요즘 매일같이 점심반찬을 해내느라 부엌살림에 관심이 지대한 앨리스~!



어느날 오후, 평소에 눈독을 들였는지 어쨌는지 앨리스가 갑자기 돼지를 잡겠다고 선언을 하더니 곧 혼자서 녀석을 붙잡고 낑낑대기 시작했어요. 그 모습을 보다못한 푸른소가 돼지를 들고 흔들어 돈을 꺼낼 수 있게 도와주고, 빛으로가 옆에서 셈을 같이 해줬습니다. 그 와중에 저금통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구권 지폐들을 발견한 빛으로는 옳다꾸나 신권과 바꿔가느라 바빴고, 돼지를 흔들면 흔들수록 바닥에 한 푼 두 푼 점점 돈이 쌓이는 걸 보면서 앨리스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 되었어요.



이날 이렇게 신이 나서 계산한 돈은 거의 8만원가량 되었다고 하네요. 셈이 끝나자 당장 술 한잔 하러 가자는 빛으로를 앨리스가 쌀도 사고 반찬도 사야한다며 강하게 제지하더니, 돌아서서 기쁜 얼굴로 다음날 점심에 고기반찬을 해 주겠다고 선포했답니다.

네, 뭐 이 돈으로 술을 마시든 고기반찬을 하든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어쨌거나 이 꾸준한 "삥"의 희생양이 되신 분들에 대한 심심한 애도는 먼저 표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리고 앞으로 무수히 생겨날 또 다른 희생자들을 위해서도...

ps. 이런 글 올렸다고 나루에 놀러오시는 걸 꺼려하셔선 안됩니다. 어쩌면 쫓아갈수도 있어요^^ 이 글의 핵심은 돼지 속이 다시 텅 비었다는 거니까요.
ġ ϴ ൿ! Բϴ ùൿ ȸ ȳ

댓글 '1'

앨리스

2009.07.01 10:44:07

돼지에겐 미안했지만 이날 정말 기분 좋았습니다~ 덕분에 맛있는 반찬도 해먹구 말이죠^^
앞으로도 부탁드려요~~ㅎㅎ(돼지 속이 다시 텅 비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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