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6일, 오체투지 순례단이 지리산을 떠난 지 103일만에 드디어 남태령을 넘어 서울에 접어들었습니다. 하루종일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많은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이 서울맞이 행사와 오체투지 순례에 함께 했더군요. 시민행동 사무처에서는 푸른소, 꾸리, 신비, 그리고 자원활동 중인 아달구가 과천에서 시작된 이날 행사에 참석했고,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오체투지는 하지 않고 우산을 들고 행진에 참여했습니다. 도중에 휴직 중임에도 잠시 들러준 정란아 님과 딸 나은이, 회원 엄삼용 님과 아들 강민이, 그리고 오랜 후원자이신 정금채 님도 뵈었습니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승창 님은 오체투지에 참여해 순례가 끝난 후 온통 젖고 고단한 몸으로도 상근자들의 저녁식사에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날 오체투지 행렬의 제일 선두에 선 성직자 세 분의 모습을 보니 새삼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람, 생명, 평화를 찾기 위해 나선 길임에도, 남태령 고개를 넘자마자 달려온 방배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방패로 막히고 인도로 쫓겨나면서는 잠시 분노에 차기도 했습니다. 종일 평화롭게 진행되던 행진이 오히려 경찰의 부담스런 대응으로 인해 길이 더 막히고, 시간도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그래도 한시간 쯤 대치하다 조용히 해산하게 되어 다행이긴 했습니다. 이제 순례단이 서울 시내를 지나면서 더 많은 어려운 일들이 생길 듯 합니다.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고, 교통을 혼잡하게 하는 못된 무리들로 보기 전에, 지난 수개월간 이 사람들이 어떤 길을 어떤 마음으로 지나왔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오체투지 순례단 카페 http://cafe.daum.net/dhcpxnwl


오체투지 순례단이 서울 순례를 시작하며 드리는 글


참으로 머나먼 길을 기어서 왔습니다.

마치 한 마리 자벌레처럼, 한 마리 갯지렁이처럼, 한 마리 지네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도 낮은 자세로 땅바닥을 기고 또 기어서 마침내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선 오체투지 순례단은 지난해 9월4일 하악단인 지리산 노고단에서 출발해 중악단인 계룡산 신원사를 지나 상악단인 묘향산으로 가는 참회와 성찰의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눈물과 땀방울로 길을 이어 103일 만에 서울까지 왔습니다.

독선과 오만과 독단이 앞서는 소통 부재의 시대, 기다렸다는 듯이 군부독재의 시절로 역주행하는 한반도 이 땅의 천인공노할만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우리 순례단은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왔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으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잘못인 동시에, 밖으로는 백성들의 뜻을 제대로 아우르지 못하는 소통불능 현정권의 잘못이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순례단 또한 먼저 안으로는 처절한 참회와 성찰의 자세로, 그리고 바깥으로는 위기의 한반도를 생명평화의 땅으로 일구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의 자세로 오체투지라는 극한의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이나 민족적인 재앙을 막기 위한 전국민적인 뜻을 모아 하악단인 지리산 노고단과 중악단인 계룡산 신원사와 상악단인 묘향산 보현사에서 하늘에 고하는 천제를 지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동안 지렁이처럼 꿈틀꿈틀 기어가는 하루 순례는 고작 십리 길이었지만, 묵묵히 자기 자신의 세상을 지탱하는 가난하고도 여린 손길들을 만날 때마다 일출의 장엄을 보듯 감동이 넘실거렸고, 속임수와 욕망의 혼돈 중에도 엄격한 질서를 지켜가는 대자연의 신령한 기운 안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열매를 하나씩 거둘 수 있었습니다. 낮은 데서 느리게 기어가다보니 작지만 경이로운 생명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높은 데서 재빠르게 지나칠 때는 잘 안보이던 목숨들이 낮고 누추한 자리마다 의연하고 늠름하게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눈을 치켜뜨면 30년 전의 5.18 광주처럼 용산에서 벌어진 참으로 안타까운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기에 사람들이 있다”는 호소는 끝내 외면당하고 아직까지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은 냉동실에서 시체로 외면당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울부짖음 또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생존권을 부르짖던 아버지는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방화살인범’ 이 되어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극명한 현실입니다.

하루에 천 번씩 온 몸이 땅과 마주하다 보니, 너와 나 우리가 모두 한 몸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강은 내 피요, 산은 나의 몸이니 네가 병들면 내가 아프다’는 생명 본연의 감각이야말로 대오각성의 열매였습니다. 그럴수록 중생들의 신음은 더욱 커지고 참으로 한심한 소식들만 밀려왔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라는 말만 바꿔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 하고 녹색성장이라고 꾸며댑니다만 이는 민족의 젖줄인 ‘생명을 팔아서 황금을 챙기겠다’는 거짓 희망이자 ‘사람을 잡아서 우상에게 바치자’는 무서운 노름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자포자기의 비관도 문제입니다만 철없는 낙관도 위험한 짓입니다. 차라리 정직한 절망이 진정한 희망의 시작입니다. 거짓 희망에 속지 말고 더욱 냉정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더 갖게 되고, 더 갖게 되면 다 좋아질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질수록 불안하고, 오를수록 위태롭고, 배울수록 무력하고, 이길수록 두려워지는 현실을 이미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입니다. 경제가 좋아질수록 오히려 자살률이 높아지는 등 사람들은 더 망가졌으며 나누고 아끼며 어울려 사는 즐거움마저 사라졌습니다. 말씀드리기 괴로운 역설이지만 사람이 사람다운 경제가 아니라면 차라리 하루 빨리 망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멀쩡한 목숨이 여섯이나 새까맣게 타죽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잔인해지고 인간성이 크게 무너진 이유는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 전체가 물신이라는 지독한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국민에게 봉사해야할 관료들은 정권과 자본독재의 종이 되어있습니다. 그들은 맘대로 고용하고 멋대로 해고하는 일을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정 최우선의 과제로 여깁니다. 사람들을 마치 폐건전지 다루듯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씨는 아이들도 어른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가난하고 약한 존재를 함부로 여기고 무시하여 노동유연성의 이름으로 혹은 왕따의 이름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래도 경쟁에서 이기면 살아남는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지금 우리는 어리석은 공멸의 길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 종교인들이 나서서 이제 촛불정신을 자신을 바로 세우는 성찰의 에너지로 삼자며 공권력이 무참히 짓밟았던 자존감을 다독거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우리 사회의 모든 기능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대통령은 본분에 충실할 기회와 권위를 돌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정부가 취한 여러 가지 조치와 태도들은 극히 실망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갖은 혜택은 극소수 특권층에게 집중시키고, 언론 장악에 몰두하거나 모든 책임과 고통을 대다수 약자에게 전가함으로써 공생공존의 생명평화 원칙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종교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가 하면, 아이들의 교육문제부터 남북문제까지 우리 사회의 중심문제들이 하나같이 교착상태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남북문제는 어느 한 정권만의 일이 아니라 신뢰와 연속성의 중차대한 민족적 사명입니다. 지금처럼 위기의 민족대결 구도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반도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는 일이니 민족 공동번영의 길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들도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생명 자체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그 어떤 묘수도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낮고 느리게 움직이는 목숨들을 경시하는 한 우리 사회의 불행과 탄식은 점점 깊어만 갈 것입니다. 이런 통찰은 먼저 나에게로부터 시작될 문제이지 남의 탓으로 돌려서 될 일이 아니며, 동시에 정치사회적 책임이 큰 이들이 우선 더 많이 떠맡아야 할 몫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 본분으로 돌아가서 조금만 덜 욕심내고 조금만 남을 배려해도 우리 세상은 말할 수 없이 환해지고 따뜻해질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 사람의 길을 위한 우리들의 눈물겨운 기도는 서울을 지나 임진각 망배단, 그리고 묘향산의 상악단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생의 의욕을 잃고 신음하는 사람들, 힘없어 상처받는 생명들과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웃들에게 경배하며, 그동안 함께 해주시고 또 끝까지 함께 해주실 국민 여러분께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 고맙고도 고맙습니다.


2009년 5월16일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오체투지 순례단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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