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이 참 많이 내렸다는 뉴스를 보고 익숙지 않은 눈길을 다닐 걱정에 약간은 긴장한 마음으로 버스를 탔는데요, 역시 도착해보니 톨게이트 빠져나오자 마자 내내 눈길이었습니다. 체인 없이도 그 큰 버스가 잘도 달리는 걸 보니 내심 겁이 나기도 하고요... ^^;;

터미널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오라더니 막상 택시를 탔더니 겨우 두세블럭 돌고 도착하는 거리이지 뭐예요. 바로 여기, 부안 주민투표 관리위원회 사무실입니다.

무려 7개월동안 무수한 격론과 다툼이 벌어지고 지역경제마저 마비상태에 다다랐음에도 이제껏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문제를 주민투표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꾸려진 부안방폐장유치찬반주민투표위원회(http://buanvote.or.kr).
오는 2월 14일, 7만여 부안군민의 자발적인 찬반투표로 모아지는 의견은 부안방폐장과 관련한 정책결정과정에 중요한 자료로 참고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지요.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으로 다가서니 찬바람 맞으며 경호를 하고 있는 경찰들이 제일 처음 보이고, 그 다음으로 확성기 매달아놓은 트럭이 보입니다. 사무실 안에는 위원회에 참여한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파견된 활동가들이 회의며 사무처리에 분주한 모습이었고, 그 한켠에서 이번 위원회의 사무처장을 맡은 하변(하승수 변호사)이 진지하게 인터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변두리 늬우스 처음부터 자세히 보신 분이라면 기억하실 거예요.
일전에 시민행동 방문했다가 카메라에 포착되었던 바로 그 하변!

시민자치정책센터에서 활동하며 주민자치, 주민운동을 꾸준히 고민해온 하변이 이번 주민투표관리위원회의 사무처장을 맡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보통때는 마주치면 편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하변이 여기서는 전에 없이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괜시리 변두리도 덩달아 긴장하고... 아무튼 휭허니 구경이나 하겠다고 찾아가서 어슬렁거리기에는 무척이나 분주하고 긴박해보이는 사무실이었어요. ㅠㅠ 쭈볏거리고 있으려니 하변이 이왕 왔으니 진짜로 여기저기 구경 좀 해야하지 않겠냐며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투표 준비작업을 하고 계신 분들께 요기거리라도 좀 사다드리고 곧 주민 토론회에 가야 한다더군요.

며칠동안 쉼없이 눈이 내리고 있다는 부안의 거리. 길에는 쌓인 눈들이 질척하게 녹아 내리는 가운데, 길가며 상점이며 시선이 닿는 곳마다 찬반의견 및 투표참여를 호소하는 문구와 깃발이 심심찮게 발견되었습니다.

"아유.. 우리 닭은 안전해요. 조류독감이라니, 처리과정을 안다면 그런 말 못하죠. 얼마나 깨끗하게 하는데요..." 안그래도 새만금이며 방폐장이며 지역개발사안들로 인한 연이은 분쟁으로 어업, 농업, 관광업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부안 주민들이 치명타를 입고 있는 판국에 조류독감, 광우병 같은 돌림병은 또하나의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있는 듯 했어요. 그래서일까요? 무얼 사갈까.. 회니 족발이니 고심하다가 부러 닭집을 찾아가 통닭을 주문한 까닭 말이에요.
통닭 두마리에다 소주 한 상자 사들고 찾아간 곳은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어느 공업사 작업장이었어요. 여남은 분들이 추운데 모여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계신데, 그것이 무엇인지?


파이프를 절단하고 용접하고... 나무판을 크기에 맞춰 자르고... 가만 보니 그것은 바로 투표할 때 쓸 기표소였습니다. 선관위나 지방정부나 투표인명부 작성이며 기표소와 같은 기물 사용이며 어느 것도 협조해주지 않는 상황에, 사서 하자니 무려 천여만원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결국 주민들이 직접 팔 걷어부치고 나서게 되었다나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료만 사서 직접 만들고 있는 주민들. 이분들은 알고보니 지난 몇달간 지속되었던 반대 주민들의 자발적인 촛불시위를 위해 매일같이 무대를 설치하고 철거했던 이른바 '무대팀'이라고 하는군요. 도장을 잘 찍으려면 나무판에다 장판을 깔아야 한다느니 신문지를 깔자느니 이분들 만나자마자 한바탕 왁자한 분위기속에 이야기판을 벌입니다.

공업사 한켠에도 역시 노란 깃발이 꽂힌 경운기가 눈속에 파묻혀있네요.
짧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급히 이동한 곳은 부안군내 13개 면단위에서 매일 한 곳씩 돌아가며 열리고 있는 주민토론회장이었어요.

또다시 눈이 보슬보슬 내리는 중에 어떤 어르신은 철푸덕 미끄러지기도 하시고.. 암튼 꽤 많은 주민들이 인근 학교 강당에 마련된 토론회장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비록 찬반투표임에도 찬성측 토론자는 섭외가 되질 않고 준비위원의 특별강연에 이어 반대측의 발제와 토론으로 꾸려지는 반쪽 토론회였지만 참여한 주민들은 진지하고 열기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우선은, 그렇게나 많이 모이실줄도 몰랐거든요. ^^;;
부안군수를 비롯한 지방정부측에서는 그렇게도 반대하는 주민들을 속여가며 정책을 강행해간 것도 모자라 이제 분을 가라앉히고 합리적으로 찬반투표를 벌여보자는데도 공무원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투표를 방해하려 안간힘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참 한심한 모양새 아닙니까... 그래도 "흥분하면 안돼. 싸움을 걸어도 참고 넘어가야지. 어찌되든 투표는 성사시켜야 한다구."라며 주민들은 차분한 모습을 보이시더라구요.

제가 갔을때는 D-8이라고 적혀있던 투표일. 돌아와서 사진을 정리해 글을 쓰는 사이 어느새 그 날짜는 사흘 앞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오는 14일 토요일은 부안에서 명실상부 주민들의 손으로 준비한 주민투표가 실시되는 뜻깊은 날로, 또 그간 주민들 사이에 생겨난 갈등의 골을 좁히는 축제의 날로 기록될 것을 믿으며 사무처와 부안 주민들 모두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