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사태 이후 민심의 거센 소용돌이가 한국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사람들은 “한국정치에, 정치인에게 걸 희망이 남아있느냐”며 장탄식을 늘어놓으면서도 기꺼이 ‘정치’를 토론하고 논쟁에 참여한다. 헌법 속에서 잠자고 있던 탄핵이라는 핵탄두가 국민을 흔들어 깨운 것인가? 무엇이 지긋지긋한 정치에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는가? 각 정파의 동원령 구호에도 이들은 꿈쩍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선거법 위반에 과태료 세례를 받을 뿐이다.
그 변화를 추동하는 사람들은 다소 추상적이지만 네티즌이란 사람들이다. 네티즌을 참여시키는 힘 한가운데에 인터넷이 가로 놓여 있다. 말하자면 인터넷이 한국 정치를 바꾸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정치권력을 마음껏 풍자하고 조롱한다. ‘정의의 사도’ 로보트 태권브이가 국회의사당을 박살내는 것도 인터넷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현실 세계에서 권력의 상징인 정치인들은 인터넷에서는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동네북’일 뿐이다. 조롱과 풍자만이 아니다. 네티즌들은 기존 오프라인 언론이 제시한 틀로 세상을 볼 것을 단연코 거부한다. 다양한 시각의 기사를 제공하는 뉴스포털이나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그들은 댓글을 달고, 인터넷 폴(poll)을 클릭해 자신의 의사를 밝히며, 온라인 토론에 참여한다. 이 같은 온라인 참여는 골방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탄핵반대 커뮤니티나 플래시 몹 등의 형태로 거리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자기 표현과 참여는 각종 규제와 단속의 대상이기도 하다. 개정된 선거법이 여전히 네티즌들의 표현욕구와 참여 욕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데다 선거관리위원회의 고루한 법적용도 네티즌들을 제약한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 참여의 새로운 마당을 펼쳐보인 인터넷. 미디어다음은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공동으로 새로운 인터넷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두 차례에 걸쳐 진단해 본다. 첫번째로 이번 총선 정국에서 새롭게 생겨난 인터넷 현상과 네티즌 문화를 정리했다."
비틀고 꼬집고 뒤집고…정치패러디 전성시대
디씨인사이드가 한나라당 현판을 '물은 셀프'라는 문구로 바꿔 패러디한 합성사진.
“정치가 더 재미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예전에 이 말은 코미디 같은 정치 현실을 냉소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정치를 즐긴다.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 블로그와 휴대폰으로 무장한 네티즌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 사이버 공습 = 특정 정치인이나 정부기관에 대한 인터넷상의 반대 운동도 활성화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나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처럼 네티즌의 인터넷 정치참여를 제약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국가기관의 사이트는 네티즌의 공적 1호다. 선관위 자유게시판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 “중립을 지켜라”는 등의 글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네티즌들은 또 탄핵사태와 관련,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의 정당사이트와 한나라당 최병렬 전 대표, 민주당 추미애 의원 등의 홈페이지에 탄핵 추진을 비난하는 글로 ‘융단폭격’하기도 했다. “▲ 오프라인 진출 = 이전의 ‘사이버 폐인’들과는 달리 최근 네티즌들은 오프라인 진출에도 적극적이다. 광화문 촛불 집회 참가자들 가운데에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매개로 집회에 참여한 네티즌이 적지 않았다. 다음카페 ‘국민들을 협박하지 마라’회원들은 21일 상복 차림으로 ‘근조 국회’라는 현수막을 들고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특히 이들은 성금을 모으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 질서시위에 앞장서 박수를 받기도 했다. 디씨인사이드 폐인들도 온라인 패러디에 그치지 않고, ‘물은 셀프’라고 적힌 생수통을 들고 나와 현장에서 풍자 한 마당을 열기도 했다. “▲ 투표 참여 운동으로 발전 = 야 3당의 탄핵 가결을 비판하는 내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패러디 작품들은 최근 4.15 총선에 적극 참가하자는 메시지로 바뀌는 추세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게시판에는 이 사이트의 마스코트인 ‘개죽이’가 한 표를 행사하면서 투표 참가를 권유하는 합성사진이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 정치 패러디= 17대 총선 최고의 유행어로 부상하고 있는 표현은 ‘물은 셀프!’다. 대통령 탄핵안 통과 뒤 KBS를 항의 방문한 민주당 지도부가 “여기 온 지 12분이 지났는데 물도 안 준다”고 볼멘 소리를 한 사실을 네티즌들이 비아냥거린 것. ‘물은 셀프!’라는 현수막을 내건 KBS 건물 합성사진 장면은 정치 패러디의 대표작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쳐드셈’이라는 생수 브랜드를 개발, 민주당 지도부에 권하는 패러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처럼 이번 총선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인터넷 상의 패러디 문화가 정치 여론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딴지일보와 디씨인사이드, 시사갤러리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패러디 문화는 총선이 가까워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같은 조짐은 지난 연말부터 인기를 끌어 결국 사무실이 압수 수색되는 사태까지 겪은 라이브이즈닷컴의 ‘대선자객’ 시리즈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 같은 패러디 문화가 탄핵안 통과를 계기로 정치 패러디로 분출하기 시작한 것. 탄핵안 통과 직후 경매사이트인 옥션에 올라온 ‘개 대량 반출(193마리)’ 경매 게시판에는 100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한 네티즌은 경매가가 20억원을 넘자 “몸에 800억을 숨기고 있는 개를 20억에 구입할 수 있다면 대박 아니겠느냐”고 꼬집기도 했다.
기술 발전과 더불어 동영상 패러디도 생겨나고 있다. 이 달 초 서비스를 시작한 ‘미디어 몹’의 헤딩라인 뉴스는 날카로운 풍자와 공중파 방송 못지 않은 맛깔 나는 사회자의 진행으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제도 정치권도 이 같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각 정당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패러디 작품들을 제작, 홍보에 활용하고 있다. 심지어 가장 노쇠한 정당으로 비춰지는 자민련은 자당의 총선사이트에 아예 ‘패러디 시장’이라는 메뉴를 개설할 정도다.
네티즌, 정치인을 탄핵한다
하지만 네티즌들의 폭격은 종종 ‘오폭’으로 이어지는 등 폐해도 낳았다. 13일 밤 KBS ‘심야토론’에 출연, “지금 20~30대는 분별력이 떨어져요”라는 등의 발언을 했던 박상희 의원을 노린 공습이 대표적인 사례다. 네티즌들은 박 의원이 경영하는 미주금속㈜의 사이트가 폐쇄돼 있는 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미주금속의 사이트를 비난 글로 도배했던 것.
독설로 유명한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으로 홍역을 치른 YTN 인터넷 사이트도 비슷한 사례다. 한나라당 입당 전인 12일 밤 SBS 대토론에 출연, 탄핵반대 입장을 밝혀 네티즌들의 반감을 싼 전 대변인이 ‘YTN 제작부주간’을 지낸 것으로 방송에 잘못 소개된 것이 화근이었다. 네티즌들은 전 대변인을 비난하는 게시글 수백로 YTN 사이트를 공격했으나 결국 전 대변인은 ‘MY TV 제작부주간’을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오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색적인 욕설과 비방으로 일부 언론에서 ‘네티건’으로 지적받는 경우도 있었다. 한 인터넷 포털의 토론게시판에는 탄핵안 가결 뒤인 13일 특정 정치인을 겨냥, ‘○○○, 니 인생도 끝났다’ ‘이 ×같은 ○○당 의원놈들아 특히 ○○○ 너!’ 등의 글이 올라 선관위 요청으로 삭제됐다. 16일에는 인터넷에 ‘한나라당 폭파단’ 카페를 운영하면서 ‘최병렬·홍사덕 죽이기’ 등 비난 글을 올린 한 재수생이 “불을 지르고 분신하겠다”며 한나라당사에 200㎖ 라이터기름 1통을 들고 난입했다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표출하고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건전한 공간으로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네티즌들은 미디어다음이 탄핵안이 통과되던 12일 ‘탄핵안 가결 순간, 당신은 어떤 심정이었나’는 페이지에 수천 건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 같은 네티즌들의 호응과 참여로 각 인터넷 뉴스 포털과 온라인 미디어들은 탄핵정국을 전후해 역대 최고 수준의 페이지뷰를 기록하기도 했다.
사이버공간에서 드넓은 현실의 광장으로
한편, 지난 해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플래시 몹(flash mob. 불특정인들이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나 인터넷으로 약속해 한꺼번에 ‘퍼포먼스’를 하고 흩어 지는 행위. )’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새로운 정치 참여 방식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70~80년대 운동권들이 하던 ‘기습시위’방식과 유사한 플래시몹은 그 동안 정치적인 목적없이 단순한 재미를 위한 놀이였다. 그러나 총선을 앞두고 플래시몹에 정치적 목적성이 결부된 것.
지난 2월 한달동안 부산지역 네티즌 100여명이 부산시내 각지에서 ‘차떼기 부패정치를 추방 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행인들에게 큰절을 하곤 해산하는 행동 을 20여차례 반복했다. 또 지난 5일과 6일에는 총선시민연대의 대학생 모임인 ‘낮새 밤쥐’와 총선 대학생연대 회원 20여명이 서울 명동과 신촌일대에서 “20대는 살아있다” 등의 문구를 적은 손팻말을 들고 플래시몹을 선보였다. 이어 총선대학생연대도 앞 으로 전국의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플래시몹을 조직적으로 펼 쳐나가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각 지역 선거 캠프가 플래시 몹을 흉내내 새로운 선거운동 수단으로 활용할 기미가 보이자 선관위가 단속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무적의 투표부대다”
디시인사이드가 제작한 투표부대 패러디 작품 가운데 하나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포스터를 소재로 한 ‘솔로부대’와 ‘커플부대’ 패러디 사진이 이번 탄핵사태를 계기로 ‘투표부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해 인터넷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패러디 포스터는 그 동안 서로 반목관계에 있던 ‘솔로부대’와 ‘커플부대’가 이번 총선을 계기로 전격 연합, ‘무적의 투표부대’를 결성했다며 네티즌들의 투표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 전문가 진단 = 함께하는 시민행동 민경배 정보인권위원장(경희사이버대 교수)은 “단순한 놀이였던 플래시몹이 시민참여형 플래시몹으로 진화했듯이,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의견 표출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정치 참여의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이 같은 현상을 단속의 관점이 아니라 건강한 에너지로 끌어안기 위한 전향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지만 “네티즌들도 감정적 언사를 자제하지 못한다면 당초 의도를 달성하기는커녕 자칫 비판하려던 쪽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네티즌들이 발전하는 인터넷 기술에 힘입어 자기를 더욱 적극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하는 현상”이라고 최근의 인터넷 문화를 진단했다. 그는 “이들은 자신들이 인터넷상에서 놀면서도 이를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탄핵과 총선이라는 정치적 소재가 던져지면서 네티즌들의 공유 욕구가 정치영역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는 “네티즌들은 정치를 바꾸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며 “그들은 놀기만 하면 되지 적극적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미디어다음 / 선대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