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지 않는 안양천 ‘소중한 가족’ 삼았죠
청계천의 재탄생은 4년 전 소설가 박경리씨 등 몇몇 사람의 머릿속에서 출발했다. 콘크리트 속에 방치된 청계천을 맑은물에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으로 되살리자는 소박한 생각과 애정이 우리나라 최대의 도시개조 사업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멋진 세상을 그려볼 자유가 있다. 그 멋진 세상을 내 손으로 만들어간다면 이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인가.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주변의 땅이나 나무 따위를 가족처럼 삼아 보살피고 가꿔가다 보면 우리 주변은 어느덧 멋지게 변해 있을 터. 1990년대 영국에서 시작한 ‘지구 입양 프로젝트’ 운동의 뜻이다.
여기 19명의 장난꾸러기 중학생들이 있다. 지난해 9월 “다른 특별활동을 할 게 없어서 생태반에 왔다”는 엉뚱한 안양중 1학년생들. 그러나 이들의 마음속에서 안양천이 새롭게 태어났다.
‘지구입양 프로젝트’ 실천… 안양중 ‘특별한’ 특별활동
잡초 뽑고 쓰레기 걷어내고…상상속 멋진 세상 우리 손으로
안양천 주위의 잡초만 무성한 빈터, 쓰레기로 범벅인 웅덩이, 삭막한 산책로 등을 ‘입양’한 아이들은 조를 짜 안양천 주변을 둘러보고 네 곳의 최종 ‘입양지’를 결정했다. 아이들은 톡톡 튀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웅덩이를 연못으로 가꾸자는 ‘안양천의 오아시스’ 사업, 시민들이 자주 오르내리는 안양천 둑에 미끄럼틀을 만들고 줄을 매달아 암벽등반 시설처럼 꾸미자는 ‘황소구멍의 리모델링’ 사업 등이 아이들의 머리와 손을 거쳐 도면과 모형으로 완성됐다.
아이들을 지도했던 스톤앤워터 교육예술센터의 윤현옥(47) 교육연구실장은 “아이들이 지구와 주변 환경을 낯선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보며 사랑하고 품어안는 법을 체험했다”며 “이 과정에서 예술적인 상상력과 과학적인 조사방법, 자발적인 문제해결 능력, 이웃사랑 등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사례. 광주 녹색연합은 지난해 첨단고등학교 봉사반 학생 20명과 함께 뒷산인 ‘봉산’을 입양해 쓰레기를 치우고 더는 훼손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 공원 나무에 이름표를 달아주고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생태지도를 만들어 전시하는 등 봉산에 애정을 듬뿍 쏟았다.
국내 첫 지구입양 프로젝트 사례들이다. 안양중의 찬식이는 ‘황소구멍의 리모델링’ 기획안을 조만간 안양시에 제안하겠다고 한다. 안양시 관계자는 “그런 제안이 있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안양천도 그렇게 재탄생할 수 있다면, 그것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라면, 거창하지 않아도 우리는 분명 더 멋진 세상을 보게 되지 않을까.
이재명 기자 miso@hani.co.kr
웅덩이를 연못으로, 황소구멍선 암벽등반 멋지지 않나요?
안양중 생태반 학생들
안양천 4곳 입양 ‘리모델링’ 나서
흉물스런 웅덩이·산책로…
“발길 줄잇는 명물로 만들게요”
지난해 9월 학교 근처 안양천을 ‘입양’한 경기 안양시 안양중 1학년 생태반 학생들은 지구입양 프로젝트를 통해 버려진 땅을 되살리고 환경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쓸모없는 공간을 휴식처로 바꾸고 시민들의 안전과 재미까지도 고려한 공간을 스스로 고안해냈다. 아이들이 입양한 장소 4곳을 어떻게 바꾸려 하는지 들여다보자.
#프로젝트 1. 안양천의 오아시스
안양천변의 콘크리트 배수로가 무너지면서 형성된 흉물스런 웅덩이를 입양한 ‘환경 수호대’조의 정훈이는 “우선 쓰레기를 줍고 배수로를 고친 뒤 더러운 물을 퍼내고 연못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원대는 “연못 옆에 벤치를 놓고, 사람들이 연못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도록 쓰레기통도 만들어두자”고 생각을 보탰다. 태영이는 “웅덩이 주변에 돌담을 쌓고, ‘이곳에 돌을 던지면 소원을 이룬다’는 전설을 표지판으로 만들어 달자”는 재미있는 제안도 했다.
#프로젝트 2. 조약돌 오솔길
석수3동 낙산빌라 3동 오른쪽 산책로 3는 사람들이 버린 공간이다. 이 무덤덤한 길을 입양한 주영이는 “길 양옆 콘크리트 경계석에 칠을 해주자”는 의견을 냈다. 원영이가 “무지개색으로 칠하면 예쁘겠다”고 맞장구를 치자, 규빈이는 “경계석이 35개니까 무지개를 다섯번이나 이어서 그릴 수 있겠다”며 웃었다. 필요한 일곱 색깔 페인트는 길 건너 페인트공장에 프로젝트를 설명한 뒤 협찬을 받고 칠이 끝나면 협찬 문구도 남기자는 제안이 나왔다. 또 오솔길에 차양막을 설치해 비를 막고 바닥에 지압용 조약돌을 깔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2m짜리 원형 봉강 34개와 너비 140㎝·길이 3짜리 아크릴 재질의 차양막으로 설계했다. 근사한 산책로가 될 것이다.
#프로젝트 3. 황소구멍의 리모델링
학교 인근의 안양천 둑 위에는 울타리에 개구멍이 뚫린 곳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어느새 ‘황소구멍’으로 커졌다. 제방에서 안양천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몇개 없는 탓이다. 하지만 이 구멍으로 드나드는 건 매우 불편하고 자칫 미끄러져 다칠 수도 있다. 현학이가 “차라리 재밌고 편리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미끄럼틀을 두거나, 줄을 매달아 줄타기가 가능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냈다. 영규는 “축대의 비스듬한 각을 이용해 암벽등반이나 그물 오르기 운동시설을 만들어 체력단련장으로 활용하자”고 보충의견을 냈다.
#프로젝트 4. 환경을 찾는 사람들의 놀이방
석수동 주택가 바로 옆 오솔길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직사각형 모양의 세평 남짓한 빈 공간이 있다. 입양을 위해서는 먼저 누가 어떤 용도로 그곳에 콘크리트를 덮었는지 동사무소에 알아봐야 하는데, 이는 정훈이가 맡기로 했다. 현학이가 “게임판으로 만들어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어떤 게임? 윷놀이, 장기, 체스, 오징어 다리 등 분분한 의견 끝에 세가지 색의 주사위, 쥐 모양의 말, 치즈 모양의 먹이를 두고 주사위를 굴려 나온 색으로 말을 옮겨 먼저 많은 먹이를 획득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으로 정했다. 바닥을 아스콘 재질로 깔아 색을 칠한 다음 게임판을 그리면 된다. 옆에 게임 방법을 설명해 주는 표지판을 설치하고 게임기구를 보관할 상자도 만들어 둔다. 노인들에게는 휴식공간, 아이들에게는 놀이공간이 될 것이다.
안양/글 이재명, 사진 이종찬 기자 miso@hani.co.kr